휘리 글·그림 / 44쪽 / 14,000원 / 창비
눈보라가 하얗게 세상을 온통 뒤덮고 거리에는 차도 사람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겨울방학을 지내고 학교에 온 아이는 어색한 마음에 친구에게 인사를 못 하고 눈을 피하고 만다. 봄꽃이 환하게 필 때까지도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먼저 말 걸어주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여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린 어느 날 우산을 쓰고 터덜터덜 신주머니를 발로 차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온통 친구 생각뿐이다.
햇살이 창가에 내리비치는 어느 날 아이는 가만히 방에 앉아 마음을 다해 편지를 쓴다. 다시 가까워지고 싶다고, 손잡고 인사하고,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을 다 말하고 싶다고. 가슴을 졸이며 쓴 편지를 부치고 답장을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강아지와 공원 호숫가를 달리고, 아무도 없는 한적한 놀이터에서 그네를 탈 때도,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도 답장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잊었던 용기』는 휘리 작가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쓴 에세이를 그림책으로 옮긴 것이라고 한다.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유난히 인사하는 것이 두렵고 부끄러웠던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아이가 친구에게 인사를 하지 못하고 눈길을 피할 때, 가슴 졸이며 어떻게 다시 다가갈지 고민할 때, 답답한 마음이 그대로 전해졌다.
그리고 내 인생의 어느 시절을 환하게 비춰주던 친구가 떠올랐다. 수없이 많은 겨울이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기에 이제는 지워져 버린 친구인데 책을 읽다가 문득 알게 됐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내 이야기를 가장 재미나게 들어준 한 사람이 바로 그 친구였음을. 그래서 나도 다시 가까워지고 싶고, 손잡고 인사하고,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을 다 말하고 싶다는 것을. 여전히 그렇다는 것을.
겨울 눈보라가 치는 날의 그림으로 시작된 그림책은 연둣빛 봄을 지나 청록이 푸르른 여름으로 이어진다. 들꽃이 만발한 여름 들판을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두 아이의 모습이 아름답다. 나는 수없이 많은 겨울과 봄, 여름 그리고 가을을 지나며 해를 두고 묵혀둔 마음과 말들을 작은 종이에 적어 편지를 띄우고 싶어졌다. ‘잊었던 용기’를 내어보고 싶어졌다.
“편지를 보내줘서 고마워. 나도 사실은 너와 인사하고 싶었거든, 이 편지를 읽고 나면 다시 반갑게 인사하자. 우리 엄마가 넌 참 용감한 아이라고 했어.”
이렇게 순수한 마음으로 다시 나의 용기를 받아주지 않을지라도, 겸연쩍은 상황에 힘을 보태줄 엄마가 우리에겐 없을지라도, 내 안의 ‘잊었던 용기’를 내어 그저 나의 따뜻했던 날들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김은미_마음성장학교 대표, 『마음이 머무는 페이지를 만났습니다』 저자 / 2022-07-01 09:00
